후드티를 꺼낼 때가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후드티를 옷장 한 구석에 처박을 때가 되면 그 하얀 후드티와 눈물의 작별 인사를 하며 후덥지근한 공기와 맞서 싸울 준비를 한다. 어떤 계절을 느끼는 법은 생각보다 사소한 것에 있다.
싱가포르는 후드티를 입을 수 없는 날씨다. 후드티를 입는 순간 몸과 후드티 사이에 적당한 공간감이 아닌 습기가 가득 찬다. 옷이 속까지 축축하게 젖어버리니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옷은 얇디얇은 반소매 티셔츠, 민소매 티셔츠 뿐이다. 바깥의 공기와 바로 만나는 옷만 입고, 계절이랄게 없으니 1년 내내 같은 옷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건물 안은 꽤 춥다. 영화관 안은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운 곳도 꽤 있어서, 영화 하나를 보고 바깥에 나가면 안경에 닦이지도 않는 김이 잔뜩 껴버린다. 안경과 휴대폰 액정을 닦으면서 피부 위에 생기는 습기의 막을 느껴본다. 후덥지근한 공기와 매번 직접 닿아가면서 땀 흘리고 살아가는 게 여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막의 느낌도 여름일 수 있다.
습하면 불쾌하다-는 것이 정론이다. 물 속을 걸어다니는 느낌, 찜기에 들어간 것 같은데 내가 혹시 만두인거냐며 애써 농담을 던지게 하는 느낌. 한국에서는 습도와 온도가 높은 날에는 곧 죽어도 안 나간다며 집 안에서 버틴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온도와 습기는 어떤 특별한 인상을 주는 지표가 아니었다. 1년 동안 변하지 않으니까, 특별히 싫은 것이 아니고, 특별히 별로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물 속을 걷는 기분, 만두가 되는 기분 이제 적응했다는 거다.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여기 살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지라고 물음을 던졌던 한 달 전의 나에게 그나마 답해줄 만한 꼭지가 생겼다. 난 이제 고온다습을 더 잘 견딜 수 있는 사람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여름이 시작되겠지, 23년 인생 최초로 8개월 동안이나 여름에 살아갈 거니까. 난 무려 8개월 간의 여름을 즐기는 사람이 될 테다. 싱가포르의 온도와 습도 덕분에 모든 여름을 더 즐길 수 있을 거다.
후드티를 집어넣어야 해도 민소매 티셔츠를 꺼내며 이곳의 여름을 ‘그곳의 여름’으로 기억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