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를 꼬박 한 달 떠나 있었다. 돌아와보니 프라하는 한껏 푸르다. 앙상하던 나뭇가지들은 온데간데 없고 방금 돋아난 게 분명한 연녹색 잎들이 사방에 천지였다. 꽃도 다 피었다. 그 사이사이를 전부 놓치고 장면 전환하듯 프라하의 봄에 도착해 있었다. 환절기 내내 길 위에 있느라 계절이 바뀌는 것을 하나도 몰랐다.
4월의 여행 동안엔 방랑한 거리만큼 이 편에서 저 편으로 건너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아올 길이 요원해 보였다. 모든 여행이 조금씩 그랬지만 이번엔 정말로 달랐다. 이전으로는, 그러니까 떠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돌아온 프라하마저도 환하고 푸르게, 모든 게 다 달라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또 새로운 곳에 도착한 사람처럼 도시를 낯설어했다.
영국 여행을 마치자마자 열흘 정도를 H와 함께 여행했다. H는 두 달 전 내가 한국에서 프라하로 떠나올 때에 인천공항까지 날 데려다 준 사람이다. 이른 아침 공항에서 나의 엉성한 짐 정리를 도와주고 말차라떼 한 잔을 쥐어줬었지. 코펜하겐을 떠나던 내게 E가 해주었던대로야. 했었다. 여행 때 보자. 인사하고 씩씩하게 떠나와 두 달을 보낸 뒤 다시 만났다. 이번 여행은 폴란드에서 출발해 발트해의 세 나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차례로 거쳐 덴마크에서 마치는 여정이었다. 덴마크에선 바로 그 E를 함께 만나기로 했고, 폴란드에선 아우슈비츠에 가기로 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근사한 공연을 보기로 했다. H와 알고 지내는 동안 켜켜이 쌓은 시간의 더께를 열흘의 여정으로 잘 접어두었다.
아우슈비츠를 가보는 것으로 시작된 여행은 쏜살같이 4월 한가운데로 향해가고 있었다.어김없이 4월 16일이 다가오고 여전히 팔레스타인에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때였다. 도시와 도시를 오가며 H와 버스를 탈 때엔 몇 해 전 버스를 타고 H와 함께 갔었던 5월의 광주를 생각하기도 했다. H와 내가 가까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발 딛은 세계에서 좀처럼 웃지 못한 채 자꾸만 쇠약해지는 마음을 서로가 일찍이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아우슈비츠엔 왜 가고 싶었어? 묻는 H에게 초라하고 자신없게 대답했다. 시간을 더 쓴다고 더 나은 대답을 길어낼 수 없었다.
살면서 한 번은 가봐야할 것 같아서 ………
근사한 여행기를 적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여행 속에서의 모든 나의 마음을 언어로 가질 수 있었다면. 묘한 때였다. 19일은 나의 생일이기도 했는데, 그 즈음 시작된 사랑니의 야속한 통증이 여행 끝까지 불편감으로 함께했다. 우리가 통과 중인 4월의 의미를 잘 헤아리지 못하고 말도 글도 모자란 채 모든 게 어렴풋한 그 전체의 시간을 망라한 통증 같기도 했다.
우리의 여행 계획엔 꼭 가야하는 곳 같은 건 없었다. 어디가 무엇으로 유명한지도 많이 알아보지 않았다. 졸리면 잤고 피곤하면 쉬었고 카페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갔다. 호텔방에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할 수 있었다. 그러다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장소들을 충분히 좋아했다. 그렇게 느리고 소박하게 다녔는데도 열흘 남짓은 찰나 같았다.
유럽에 지내며 가장 적응하지 못한 것은 열쇠로 집 문을 열어야한다는 것이었다. 프라하 에 처음 왔을 땐 어떻게 돌려도 문이 열리지 않아 5분을 우두커니 대문 앞에 서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열쇠를 잃어버리지 않게 지키며 살아가야한다는 것. 언제나 내 품에 지켜야할 열쇠가 있다는 것도. 코펜하겐에서 지낸 집의 열쇠는 H가 내내 지켜주었다. 코펜하겐의 집도 열쇠로 문 열기가 까다롭기는 마찬가지라, H는 코펜하겐을 떠나던 아침에야 아 이제 어떻게 여는지 알겠다고 말했다. 다음엔 잘 열 수 있으니 좋은 일이다. 다음을 모른대도 상관 없다.
코펜하겐을 떠나기 전날 밤 H가 좋아했다던 빵집에서도. 피스타치오 크로아상이 맛있다는 가게였는데 너무 늦은 시간에 간 탓인지 다 소진되고 없었다. 직원은 내일은 정말 먹을 수 있으니 내일 꼭 다시 오라 말했고 우린 구태여 내일 아침 코펜하겐을 떠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일 피스타치오 크로아상을 먹으러 정말로 다시 올 수 있을 것처럼 인사했다.
말하자면 작별법이다. 어떤 작별도 충분하지 않다면. 내일도 볼 것처럼 인사하기. 계속 이곳에 있을 것처럼. 내일도 만날 것처럼, 언제고 바로 만날 사람처럼 헤어지는 거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배웅과, 작별과, 재회는 아주 익숙하지만 능숙하진 못한 것이었다. 내가 H와 함께 다니던 학교를 결국은 떠났을 때, H가 코펜하겐으로 떠났을 때, 그리고 내가 프라하로 떠났을 때, H와 찰나 같았던 여행을 마치고 내가 스톡홀름으로 떠났을 때, 그리고 또 기꺼이 기쁘게 예정한, 다가오는 9월의 작별.
코펜하겐에서의 여행이 끝나면 나는 스톡홀름으로, H는 헬싱키를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었다. 우리가 작별에 미숙하다는 것을 그만 까먹고. 북유럽에 좀 더 오래 머물려던 것뿐이었는데, H가 생각한 것보다 나는 더 깊이 슬퍼했다. 또 다시 H가 나를 배웅했다. 인천에서처럼. 스톡홀름으로 가는 기차를 탄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 흔들어주었다.
코펜하겐을 여행하던 어떤 날 H와 지하철을 탔을 때, 부모가 미처 못 탔는데 지하철 문이 닫힌 바람에 엉엉 울던 어린 아이를 H가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게 갑자기 왜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다. 꼭 그 어린 아이처럼 나도 엉엉 울고 싶었다. H가 아직 타지 않았는데 열차가 출발해버린 것 같았다. H와 헤어지고 혼자서도 의연하게 여행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자만을 거두며 외로워했다.
가봐야지만, 해봐야지만 알 수 있는 거구나. 뭐든 겪어야만 한다는 것을. 어떤 것들은 도무지 상상으로는, 말과 글로는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이곳에서의 삶도, 이번 여행도 막연히 전망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스톡홀름으로 향하던 기차에서의 외로움도. H에게 여러 번 들은 이야기 역시 지금 들으니 전혀 다른 이야기 같았다. 그 전망이 얼마나 허무하고 시시한 것이었는지를.
그리하여 이곳에서 보고, 겪었던 한낮은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어디에도 없는 것이라니. 그래서 나의 것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