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기를 쓰기 전 친구들이 좋아했고 낯 가렸고 또 조금은 싫어했던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쭉 읽어봤다. 배신감이 들었다. 나만 존댓말로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톤 앤 무드를 맞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했다. 이런 건 미리 말해줬어야지!
사실 이게 그들과 나의 거리인 거다. 물리적 거리, 시간적 거리(우리는 시차가 참 안 맞는다), 그리고 마음의 거리. 지레 가까운 척 너스레를 떨어 봐도 지금 넷은 참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요즘은 내가 발 딛고 사는 서울 어딘가, 2025년 4월의 어느 날에서도 멀리 떨어져 버려, 그냥 부유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최근엔 일을 시작했다. 끝 맺음과 새로운 시작 사이에 애매하게 생겨난 몇 개월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9시 출근, 6시 퇴근과 함께 일상은 안정됐지만 마음은 더더더 붕 뜬다. 내가 이 곳의 영원한 일원도, 정확히는 잠시의 일원도 될 수 없기 때문을 알아서. 시키는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공부를 하고, 더 자주는 하마처럼 물만 마시며 과거를 생각한다.
여기저기로 흩어져 내가 봤던 풍경들을 배달해주는 친구들 덕인지, 자꾸 2년 전을 떠올린다. 내가 두고 온 것들, 2년 간 닳도록 쓰다듬으며 살았던 기억들, 이제는 어렴풋한 하늘을. 벌써 2년이나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그 봄과 여름을.
왜 가는 거지, 가도 될까, 가서는 잘 지낼 수 있을까, 돌아와선 뭘 하지, 상념을 떨쳐내고 떠난 교환학생 생활에선 맘껏 흘러가며 살았다. 될 수 있으면 현실에 발 붙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4개월, 충분히 짧은 시간은 그럴 수있다는 면죄부가 되어줬다.
돌이켜 보면 그곳에서도 어떤 안정감이나 확신 같은 건 누리지 못한 채 하루를 그저 '보냈다'. 내일은 골목 빵집의 캐셔가 애써 스페인어를 내뱉어 보는 동양인에게 조금 더 친절하기를 바라면서, 갈수록 마주하기가 껄끄러워졌던 플랫 주인이나 옆 방에 사는 소녀와 되도록 같은 시간에 부엌을 쓰지를 않기를 바라면서. 그때도 마음은 붕 떠 있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겉으론 환대하지만 절대 그들의 이너서클에는 들어갈 수 없는 유러피안 교환학생들과 친해지기는 애당초 목표에서 지워버렸다. 나와 내 나라를 궁금해하지 않는 이들에게 마음 다해 나를 드러내보일 다정함은 내가 갖지 못한, 사실 가질 필요 없다 생각한 덕목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바르셀로나의 하늘이 좋았다. 날씨가 거의 변하지 않고, 드물게 흐리며 많은 시간 포근했기에. 여러 나라를 쏘다니기도 했지만 가까이에 돌아올 공간이 있다는 게 꽤나 기꺼웠다. 돌이켜보면 그 공간조차 내 것이 아니라는 점이, 그저 머무르기만 하다가 두고 떠나올 수 있었던 것이 좋았나보다. 내가 선택했기에 '흔들리며 흘러가기'만 해도 괜찮은 시간이었다는 뒤늦은 단상.
밖을 보지 않고 사는 나날인 터라 지난날의 햇살들로 이번 일기를 채워본다. 사진의 푸르름으로, 깊이 침잠하는 이번 일기와 일상을 애써 가려본다. 그때가 좋았지 하며 과거만 되짚는 미련한 짓도 그만하게 될 날이 언젠간 올 거다. 그날이 올 때까지 도피의 기억이 더는 흐려지지 않기를. 그보다, 다음 일기는 조금 더 색색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