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세계를 한 바퀴 돌아 교환일기가 나에게로 도착했다. 물론 하나씩 잘 받아보고 있었지만 편집자 창에서 읽어보는 기분이 묘했다. 내가 그리워하는 광주의 이야기와 언젠가 발을 디딜 프라하, 런던의 이야기가 모두 한 곳에 모여있고 하나의 공간에서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감정을 더해주었다. 나의 그리움과 기대감을 자극하는 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경험이다.
싱가포르에 온 이후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한국 여행 가려는데, 행선지를 추천해줄 수 있어, 라는 물음이었다. 그럴 때마다 큰 고민에 빠지곤 했다. 안국 쪽을 추천해줄까, 강원도의 어느 곳을 추천해줄까와 같은 상념에 빠지다가 결국 서울의 어딘가를 내뱉었다. 거길 가 봐.
그렇지만 이런 질문을 받아 본 모든 이들이 조금이라도 떠올렸겠지만 서울에 살았던 사람인 나에게 그러한 “관광지”같은 곳은 서울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추천을 못 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연유는 내가 서울에 살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내가 살면서 수많은 나의 마음, 생각, 경험들 전부가 내가 아는 서울을 이루고 있으니까.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보자면, 여기 아시아 대륙 최남단의 한 섬에서 내가 살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까. 내가 이곳에 관광 혹은 여행과 같은 찰나의 반짝임이 아니라 기-인 신호를 남기고 간다는 것을, 많은 마음을 남기고 간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내가 살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경험과 마음과 생각을 뱉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붙잡히곤 하는데,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얼마만큼 이 도시와 감응하고 있냐는 물음이다. 명확한 기억을 안고 살아간 이후로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오랜 기간 살아본 경험이 없는 연유로, 나는 이 질문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내가 이곳에 익숙함을 단번에 알려줄 수 있지. 내가 이곳에 대해 생각했다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리지.
정말 어딘가에 살았다는 것, 산다는 것은 한편으로 많은 증명을 요하는 작업이다. 나의 위치정보 이상으로 많은 것을 요구하며 스스로도 그 증명을 계속 찾는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영원히 느끼면서도 이곳의 삶에 발붙이고, 발붙였다는 것을 기억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기록으로도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무리 기록이 있어도 내가 이 도시에서 어떤 마음도, 생각도, 경험도 붙이지 못한 채로 둥둥 떠다녔다면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싱가포르는 "산다"는 개념적 논의 저편에는 늘 진짜 삶이 존재한다는 걸 잊지 못하게 했다. 나는 집이 무너지고 부서지고 없어진 자들의 이야기들에 다른 시선을 붙이게 되었는데, 발붙일 곳을 잃은 자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보았다. 싱가포르에도 정말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살고 있다. 필리핀, 캄보디아 등지에서 온 이주민들은 어딘가 소름끼칠 정도로 완벽한 싱가포르에 늘 걸터앉아 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일한다.
그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들, 어디에도 속하는 것을 거부당한 이들의 이야기들을 찾고자 한다면 이곳에는 그 이야기가 무더기로 있다. 아무리 존재하고 있어도 말레이계라는 이유로, 싱가포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고 있다는 것 내지는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이들. 살았다는 경험을 증명하기도 어려운데, 발붙이지 말라고 떠미는 것 같았다. 우리는 얼마나 다르지라는 반문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