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을 보러 아주 오래 기차를 탔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였다. 스페인에 가면 벤야민의 무덤이 있대. 포르부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가장 가까운 도시는 기차로 두 시간 반이 걸리는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에 가면 하루를 비워 포르부에 다녀와야겠다. 스위스, 남프랑스, 포르투갈을 거쳐 스페인으로 향하며 세운 계획이라곤 그것 뿐이었다.
발터 벤야민은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스페인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포르부는 그가 마저 국경을 넘지 못하고 모르핀 중독으로 사망한 곳이다. 그곳엔 그를 기리기 위해 대니 카라반이 지은 건축물인 passages, 파사주가 그의 무덤으로 놓여있다. 나는 그의 이론을 연구하는 연구자도 아니고 그를 마음 깊이 좋아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순례 같은 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무덤을 보러 가는 여행을 원했을 뿐이다.
포르부로 가는 기차는 미리 예매할 수 없는 오래된 지역 열차라, 이른 아침 바르셀로나 산츠역에 가서 왕복 기차표를 직접 샀다. 유난히 모든 열차의 연착이 긴데 아침부터 사람도 많았던 플랫폼에서 예정 시간보다 40분을 더 기다려 기차를 탔다. 모든 사람들이 느긋해보여서 나도 가만히 낡은 벤치를 찾아 앉아, 같이 기다리는 사람들 중 나와 같은 기차를 타는 사람을 마음 속으로 몰래 골라보는 놀이를 했다. 그러다 들어오는 열차를 그 사람이 타버리면 무척 아쉬워했고.
알고보니 F1 경기가 한창인 스페인이었다. 모든 열차가 F1 경기가 열리던 몬트멜로를 경유하느라 사람도 북적이고 연착도 길었던 것이다. 맥라렌 모자를 쓴 사람들과 우르르 기차에 탔고 모두가 몬트멜로에서 내렸다. 기차를 타고 나선 포르부에서 같이 내릴 사람들을 몰래 맞춰보는 놀이를 했다. 아직 포르부는 한참 멀었는데 남몰래 골랐던 사람이 내리면 또 쓸쓸하고 아쉬웠다. 포르부까지 도착했을 땐 기차에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날 포함한 두어 명 정도가 기차에 타 있었고, 포르부에선 혼자 내렸다. 남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프랑스까지 가나보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에 있는 마을이라, 다음 정착역부터는 프랑스였다. 기차표를 어플 따위로 미리 사둘 수 없단 얘길 들었을 땐 이거 그럼 매진 돼서 못 가는 거 아냐? 부터 생각했는데, 어림도 없이 고요했던 여정이었다. 뭐든지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살 수 없고 갈 수 없는 세상에서 귀한 경험이다.
(혹시 무덤을 보러 포르부에 갈 계획이 있다면 참고하길 바라며 자세히 적는다. 다녀온 사람들의 블로그는 간간이 보았는데 의외로 아무도 가는 방법을 일러두지 않아 꽤 헤맸다. 바르셀로나에서 포르부를 바로 잇는 플릭스 버스나 알사 버스는 없고, 기차도 없다. 오로지 R11 지역열차 노선 뿐이고 OMIO 같은 플랫폼엔 검색도 안 되는 노선이다. R11 홈페이지에서 시간표를 확인할 수는 있으니 시간을 잘 봐두었다가 당일날 산츠역에서 표를 직접 구매하면 된다. -당일 표만 살 수 있다. 하루이틀 미리 사두는 것도 불가능하다.- 산츠역에서 돌아오는 표까지 포함된 왕복표를 끊는 게 더 저렴했던 것 같고, 실제로 포르부역에선 무인발권기나 직원을 찾기 어려웠던 듯. 작고 느린 간이역 같으니 왕복표를 끊는 게 확실히 낫다. 돌아오는 시간은 정하지 않아도 된다.)
기차역에서 무덤이 있는 언덕까지는 10분이 좀 넘게 걸린다. 곳곳에 표지가 있어 구글맵 없이도 걸어갈 수 있다. 벤야민이 머물렀던 호텔, 지나쳤던 식당…… 길가에 사람이 거의 없는 작고 오래된 마을이다. 높은 건물은 하나도 없고 차도 없고 정다운 식당과 마트만 종종 있는. 복숭아를 먹으면서 마냥 걸으면 슬며시 바다가 보인다. ‘만’이라고 부르나. 동그란 해안선이다. 끝과 끝까지 아주 금방 뛰어버릴 수 있는 작고 동그란 해변은 꽤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무덤을 보려면 언덕을 조금 올라야한다. 바다를 땅으로 두고 서 있는 위치가 점점 높아진다. 목적지에 다다라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 풍경은 정말 근사했다. 그 작고 아름다운 마을을 저 아래 두고 이 높다란 언덕에 쓸쓸히 놓인 무덤이 아주 사무칠만큼.
파사주 passage 는 언덕에서 바다로 향하는 계단을 낸 ‘통로’다. 이 통로는 과연 무엇과 무엇을 잇고 있나. 출구는 죽음 뿐이었던 어떤 망명길의 고독을 가둔 계단에서 나는 조금 울었다.
계단 끝과 바다 사이에는 유리벽이 있다. 유리벽에는 언젠가 벤야민이 썼던 말이 독일어 원문으로 적혀 있다. 이름 없는 이들의 기억을 기리는 것은 유명한 이들의 기억을 기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 역사의 구성은 바로 그 이름없는 이들의 기억에 헌정되어야 한다. 그 너머 일렁거리는 파도가 유리벽을 스크린 삼아 영원히 재생된다. 이름 없는 이들의 기억처럼.
그곳이 북적이는 관광지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꽤 오랜 시간 그 계단을 독점했다. 중간 즈음에 걸터앉아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모든 서글픔과 사무침, 쓸쓸함과 외로움이 넘실거렸다.
한나 아렌트도 벤야민의 흔적을 찾으러 이곳에 왔다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다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나 역시도. 이것이 그가 본 마지막 바다라면, 누군가의 마지막 풍경을 내가 본 것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