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서, 성은
영화 얘길 하려니 머쓱하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해본 적은 없는데, -왜냐하면 내 주변에 영화를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영화에 대한 나의 진정성은 아무튼 조금 애매한 편이다. 그래도 최근 가장 몰두해있는 것은 긴 시리즈를 보거나 영화를 보는 것뿐이다. 한 번 시작된 이야기는 반드시 끝나야만 하고, 새로운 이야기도 반드시 태어나야 하니까. 여전히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시간이 넘치게 하릴 없었던 유럽에서의 생활 내내 영화를 보는 약간의 부지런함과 끈기는 조금 익혔다고 할 수 있겠다. 멋진 곳에서 좋은 영화를 많이 보았다. 영화의 줄거리를 조리있게 적어주거나 감상과 비평을 쓸 순 없지만. 영화를 보는 일에 그렇게까지 재능 있지 않다. 이어지는 글은 몇 가지 영화를 나열하긴 하지만, 보다가 울었다는 얘기밖엔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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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시작해 발트 해를 따라 북쪽으로, 북쪽으로 이동하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마쳤던 열흘 간의 여행이 끝나고, H와 헤어진 뒤 나는 홀로 스톡홀름으로 향했다. 그때의 외로움과 쓸쓸함에 대해선 언젠가의 일기에 적어두었다. 스톡홀름의 날씨는 내내 좋지 않았고 그즈음엔 발목을 견인하듯 걷고 있던 참이라, 머물던 호텔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H가 추천해주었던 브랜드에서 마음에 쏙 드는 데님 가방을 하나 산 것과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모데르나 무셋에 다녀온 것 말고는 이렇다할 사건이 없었던 여행이었다. 호텔 1층의 로비가 꽤 근사하고 편안한 공간이라 더욱 밖으로 나설 생각이 들지 않았던 탓도 있다. 비가 내리긴 했지만 큰 항구가 통창 너머로 보였고, 아마도 흔히 북유럽 미감이라 여겨지는 곧고 선명한 선과 면과 색으로 만들어진 가구들이 멋진 공간이었다. 화상회의를 하거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난 그 틈새에 멋쩍게 앉아 영화를 한 편 봤다.
뭘 봤냐면, <리얼 페인>……. 제시 아이젠버그가 만들고 출연한 영환데, 사촌지간인 두 남자가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고향인 폴란드로 역사 기행을 떠나는 내용이라고 했다. 아우슈비츠를 가는 것으로 시작된 H와 나의 여행 끝에 보기엔 더없이 좋은 내용이었다. 우리도 정말 아우슈비츠를 가기 위해 이 여행을 시작했으니까. 아마도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안일 H에게도 우리에게 특별히 재밌을 것이니 도착하면 꼭 <리얼 페인>을 보라고 메시지 남기며 호기롭게 재생버튼을 눌렀다. 그래선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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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페인>은 진짜 좋은 영화다. 우린 크라쿠프와 아우슈비츠를 여행했고 리얼 페인의 주인공은 바르샤바와 다커우를 여행했으니 엄밀히 영화 속 여행기를 몽땅 나의 것으로 치환할 순 없지만 -하지만 뻔뻔하게 그렇게 했다.- 벤지가 피아노를 치던 식당은 정확하게 우리가 갔었던 식당과 닮아있었고 우린 그 식당에서 꽤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다. 수용소를 여행하던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수용소를 오가며 나눴던 대화나 그곳의 풍경들. 나 역시도 알고 있는 것이라 우기기에 충분했다. 여행의 정서를 환기하고 되짚고 추억하는 것에 더할 나위 없는 듯 했다. 그러다 정확히 30분 후,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데, 수상하게 오열하는 아시안 여자가 될 수 없어서, 눈물을 더 이상 참기 힘들어졌을 때 객실로 돌아가 홀로 결말까지 봤다. 그리고 엉엉 마음껏 울었다.
아주 이상한 남자 벤지가 나온다. 누구에게도 원인을 따져물을 수가 없는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미지의 문제를 떠안고 사는데, 그런 그의 바깥에도 문제가 너무 많다. 아주 역사적이고 거대한 슬픔도 있다. 나의 슬픔과 고통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을까?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질문들. 그러다 문득 벤지가 이런 말을 한다. 이런 세상을 살면서 매 순간 행복하기만 해선 안 돼. 위로 같기도 했고 저주 같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으로 삶의 많은 것들은 해소될 수 있다. 실제로 그랬다. 모호한 불안과 고통도. 낯선 곳에서 문득 솟던 용기나 진심을 페달처럼 밟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변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언제나 다른 내가 됐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제자리로 돌아가기도 하니까. 온갖 이벤트 연속 발생 우당탕탕 폴란드 다크투어를 마친 벤지가 공항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것으로 끝이 났던 <리얼 페인>. 함께 여행한 소중한 형제와 뜨거운 포옹도 나눴고 밑바닥 같은 속 얘기도 꺼내 놓았다. 모든 게 괜찮으리라 생각하며 형제는 떠났는데, 벤지는 그냥 공항에 남았다. 영화를 본 뒤에도 나는 수많은 공항을 오갔고 공항에 오래 앉아 있어야할 때마다 <리얼 페인> 속 벤지 생각을 했다. 짧게라도 꼭 그 인물을 떠올렸다. 우두커니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떠나거나 도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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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을 틀었던 것은 프라하에서의 무료한 3월 조만간 튀르키예에 가면 좋을 것이다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아름다운 튀르키예의 휴양지가 근사하게 묘사되는…… 문제는 잠이 쏟아졌다. 시간이 넘치게 많았을 때였고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웬만하면 끝마치는, 말하자면 이야기의 지구력이 꽤 좋은 편인데도 틀자마자 잤다. 잠이 와 가물가물 흐려지는 시야로 폴 메스칼의 슬픈 얼굴이 언뜻 일렁거렸다. 낮잠에서 깨고도 왜인지 다시 시작하지 못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튀르키예에도 가지 못했다. 지난 3월이었다. 튀르키예에선 큰 시위가 일어났고... 22년째 장기 집권 중인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던 이스탄불 시장이 체포 및 구금됐기 때문이었다. 한국도 사정이 좋지 않던 때였고, 화마 속에서 다치고 지친 이스탄불 사람들의 모습을 연일 뉴스에서 봤다. 여행은 가지 못했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든 갔어야했다고. 튀르키예를 영원히 모르는 곳으로 남겨둔 채 돌아온 한국에서 <애프터썬>을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끝까지. 영화를 다 보고 나는 정말 괴로웠다. 더 할 수 있는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너무 슬펐고 말도 안 나왔다. 왜 봤지? 왜 안 봤지? 두 질문이 공회전했다. 영화를 본 직후에 써뒀던 코멘트라곤 “아진짜괴롭다………” 밖에 없더라. 영화가 다 끝난 뒤에 꽤 오래 울었고 -사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눈물이 났다. 영화 내내 나를 괴롭게 한 회한과 약간의 긴장이 다 걷어진 후에야 울 수 있었으니까.
주인공 소피가 어린 시절 아빠 칼럼과 떠난 한여름 튀르키예 여행의 기억이 캠코더를 타고 흘러나오는 어렵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건져올리는 장면들은 기억이란 게 늘 그렇듯 흉터 같은 장면들이다. 어렸던 자신의 흐릿한 기억을 헤집어 소피는 무언가 알게 된다. 이해에 가닿을 수 있을만큼 충분히 슬퍼지고 나서야. 알고 있었지만 몰랐던 것, 몰랐지만 사실은 알았던 것. 누구도 어떻게 해줄 수 없었던 고독과 우울에 깊게 침잠해 있었던 그 때의 칼럼을.
칼럼이 소피에게 쓴 엽서를 오래 읽어보았다. 나의 곁을 떠난 사람들도 언제고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랬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였어. 그 모든 것과는 상관 없이 너를 정말 사랑해.
전후의 어떤 이별과 만남과 상처와 슬픔도 훼손할 수 없는 것들로 이뤄진 순간들이 분명 있다. <애프터썬>의 튀르키예가 그러했지. <리얼 페인>의 폴란드도 마찬가지다. 그 반짝이는 풍경들만은.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앞으로 무슨 일을 겪으며 우리가 얼마나 슬픈 사람인지와는 상관 없이. 여행이 끝난 뒤 다시는 행운과 행복이 가득한 길로 걷지 못한다고 해도. 그 때의 그 사랑만은. 다른 모든 건 어쩔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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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를 여행하던 기간 동안엔 아일랜드 소설 원작의 드라마 시리즈인 <노멀 피플>을 봤었다. 호텔방에서 매일매일 두 편씩. <애프터썬>의 주연인 폴 메스칼이 주인공 ‘코넬’을 연기했는데, 꼭 <노멀 피플>의 코넬이 자라서 <애프터썬>의 칼럼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두 작품을 연달아 보면 정말 괴롭겠지만......
<노멀 피플>에 대해서는 다음 번에 조금 더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슬라이고에서 나고 자라 학창시절을 보내다 대도시인 더블린으로 대학을 가게 되는 코넬과 마리안에 대한 이야기다. 지역, 도시, 계급, 성차,... 많은 키워드들이 이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곤 하지만 나는 그냥 내가 꼭 코넬 같기도 했고 마리안 같기도 했고. 하지만 아무것도 상관 없이 대체로 마음 아팠던 이야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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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제일 자주 갔고, 좋아했던 영화관의 이름은 SVETOZOR였다. 체코어로 '세상을 보는 것', '세상을 보는 사람'. 정도의 의미다. 좋은 영화를 많이 걸어줬다. 키노 팔레스타인과 협업해 <노매드랜드> 상영을 열어준 것도 이곳이었고.
살면서 한 번이라도 더, SVETOZOR에서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영원히 보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P.S.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너절해지는 작품들 얘기만 하려던 건 아니었다... 보았던 것들에 대한 글이니 솔직히 제일 열심히 봤던 <썬더볼츠>, <팔콘과 윈터솔저> 이런 마블 시리즈 얘기도 하려고 했다. 바로 어제까지 열흘 정도 밤낮을 태워 끝낸 8시즌짜리 <홈랜드>나 시카고를 더욱 사랑하게 해준 <더베어>, 최근 HBO 최고 흥행작 <더피트> 같은 것들, 체코어 자막 뿐인 상영관 안에서 인물들이 라틴어나 이태리어를 하기 시작하면 눈물이 났던 <콘클라베> 얘길 할 수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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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e To Cue 는
매주 금요일 오전, 또 어느 때 갑자기
각기 다른 도시의 이야기를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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