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3일 월요일. 프라하를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뭐야? 6월 23일이라는 거 영원히 오지 않는 거 아니었어? 밀물처럼 밀려드는 시간으로부터는 도망가지 못한 채 약속한 6월 23일이 와버렸다. 체코 전화번호를 해지하고 짐을 싸고 살던 집을 청소하고 공항에 가고 한국행 비행기의 수속을 기다리고. 돌아가면 조금 쉬다 강릉에서 유민을 만나고. 모든 게 다 구체적이었고 문제가 없었는데 그곳을 두고 떠나는 내 마음만 이상했다. 나는 정말 어리둥절했고…… 귀국에 필요한 지난한 일들을 처리하면서도 상황을 잘 믿지 못했다. 그 아름다운 도시를 떠난다는 것에 대해.
이번 일기는 돌아오던 비행기에서 적은 메모들을 옮겨 다시 썼다. 전등이 다 꺼진 비행기 안 잠든 승객들 틈바구니에서. 홀레쇼비체의 어떤 종이집에 갔다가 값을 치르지 않고 덜컥 받아온 근사한 노트에 적었던 것들이다. 어둠 속에서 글씨 쓰는 법은 극장에서 익혔다.
프라하에 살았던 세월은 어떻게 그렇게 찰나 같았을까? 나의 귀국에 모든 친구들이 그야말로 경악을 했다. 떠나 있는 친구의 세월로 남은 사람들이 시간을 세기도 한다는 것을 익히 안다. 누군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간은 흐르기도 하니까. 하지만 가장 경악한 건 나다. 떠날 때엔 프라하에서의 반년이 얼마나 한없을지를 걱정했었다. 사실은 찰나 같은 거였는데. 지금 간다고? 진짜로? 돌아간다고? 프라하 말고는 아무 데서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지금 이 때에? 이 심약한 내가 다시 돌아가 생활을 꾸리고 인생을 기우듯 직조해 나가야한다고? Move on… 의 때라고? 그런 6월 23일은, 영원히 오지 않는 월요일 아니었어?…… 사실 이건 다 꿈이고 눈을 뜨면 얌전히 프라하의 내 방인 것 아닐까? 지금 떠나면, 프라하가 배경이었던 내 꿈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 꿈은 언제까지 꿀 수 있을까?
4월에, 함께 발트해 연안의 나라들을 여행한 H는 내가 두고 가는 것이 도시 그 자체일 때의 슬픔을 일찍이 아는 사람이었고 다소 어리둥절해하며 귀국을 준비하던 나를 염려해 길고 긴 문자를 보내주었다. 겪어봐야 아는 거였구나. 어떤 여름 코펜하겐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던 H를 사실 나는 하나도 모르는 거였구나. 나의 환영과 환대에도 조금은 외로웠을지도 몰라. 그 때의 H가 무얼 두고 온 것이었는지를 이제야 안다.
프라하에 머물면서 가장 공들였던 것은 부식되어있던 영혼을 어떻게 돌보고 달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좋은 걸 많이 보고 많이 쓰고. 시선과 정서의 해상도를 높여보고자 애썼던 날들이 만들어준 떳떳하고 내 것 같은, 비로소 나 같은 것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프라하의 것이었기 때문에 가져올 수 없었다. 밝은 눈으로 도시를 읽고, 궁금해하고, 멀리까지 걷고. 그래서 비로소 불안하지 않던 나는 데려오지 못했지. 어떤 나는 이곳에 두고 간다. 그건 너무 명백하다. 이곳에 영영 버리듯 두고 가는 게 아주 많고, 그 중엔 분명히 나 자신도 있음을…….
떠날 때 즈음 그 도시에서 가장 사랑했던 장소들에 다시 들르는 일은 차마 슬퍼서 안 하려고 했지만, 기억이란 때로 너무 야속해서 내가 눈물 닦고 의연히 프라하에서의 삶을 추억할 훗날을 기다려주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한 치의 훼손도 없이 프라하를 기억하고 싶어서 무언가 방부제 같은 것을 가져 가고 싶었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언젠가는 마모되고 뒤틀릴 것이다.아쉽지 않게, 산뜻하게 이별하려면 지금 뿐이라는 것도. 내일도 올 것처럼, 언제고 다시 올 것처럼 인사하는 법만은 배웠다.
여행하듯 지내볼 걸. 매일을 새로워하고 설레어해볼 걸. 프라하에 평생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경솔히도 지겨워했고 지난해했고 익숙해하였다. 도시에 모르는 곳을 남겨두지 않았고 이곳이 정말 집인 것처럼 때로는 지루해했다. 당연하지만 프라하에서도 나는 아주 외로웠고 슬펐고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미래에도 붙들려있었다. 그래도 다시는 그곳에서처럼 살 수 없을 것이다.
Move on. 근데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 올해 <썬더볼츠>의 버키 반즈도 그렇고 <더베어>의 카르멘도 그렇고. 좋아했던 인물들이 유난히 새 시리즈에서 Move on.을 말하더라. 정체되고 싶어서 아주 멀리까지 와버렸던 시기에. 마지막 여행지였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냅다 Move on 간판을 단 가게도 만났다.
프라하를 떠남으로써 삶이 다시 속도를 낸다. 여전히 너무 자신이 없고, 이 시간과 공간에 잘못 놓여있다고 느끼는 채로. 이대로라도 뚜벅뚜벅 다음으로 건너가는 게 Move on. 이라면 엉엉 울면서라도 가야하는 것이다. 두고 온 도시가 그리운만큼 더 멀리 건너가야한다. 알면서도 슬펐다. 나는 언제나 길 위에서 가장 많이 울었다.
p.s. 떠나는 비행기, 사월의 <프라하>를 듣는 청승만은 정말 최악, 별로라고 생각했지만 몇 번이고 반복재생으로 들었다. 오랫동안 너를 좋아했지. 얼마나고 하면 나조차 모르게. 나는 정말 프라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