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e to Cue : 열두 번째 큐💌
프라하에서, 성은
이번 일기는 그간 보았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 되어보이는 비평 같은 건 쓰지 못했다 . ( 쓸 줄도 모른다 …) 이곳엔 언제든 무엇이고 상연되고 있던 도시들이 가득했고 그것을 좇아 부지런히 다녔으나 그 기억과 감상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만나지조차 못한 공연도 쌓였다. 전시나 공연 같은 공간예술과 시간예술의 야속함부터 서운해하며 시작해야하겠다 . 보았으나 잊어버린 것들, 못 본 것들, 좋아한 것들에 대한 낙서 같은 일기다.
유럽에 살아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랑했던 것들이 죄 여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 보고싶은 것들이 모두 여기 있었다 . 매일 이곳에서 하는 연극만 보고 살 수 없을까 ? 매일 그림만 보고 매일 영화만 본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 하여 유럽에 살면 반년의 짧은 찰나일지라도 놓치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 프라하에서의 시간은 아주 한갓지고 하염없어서 , 내가 있는 곳에서 무언가 상연되기만 한다면 언제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 그리고 어림도 없었다 ...
2 월의 파리 여행에서 스완 아를로가 나오는 해롤드 핀처의 < 배신 > 을 보고 , 베를린 영화제에서 벤 휘쇼의 < 피터 후자르의 날 > 을 봤을 때까지만 해도 말하자면 느낌이 좋았다 . 이때까지만 해도 앞으로도 평생 어디든 갈 수 있고 , 무엇이든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베를린에서 열렸던 낸 골딘 전시도 놓치지 않고 보았고 . 비엔나 알베르티나의 매튜 웡 특별전도 제때에 봤다 .
하지만 이 이후 갖가지의 이유들로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어떤 공연이 어떤 시기에 어떤 장소에서 상연 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과 몰라서 보지 못한 것 중 무엇이 더 슬픈 일인지 (…) 를 정민과 유민에게 물은 적 있다 . 정민은 양자택일의 확답보다도 너 무언가를 놓쳤구나 … 측은해하며 그 둘 사이의 슬픔을 재고 앉아있는 나의 처지를 위로해줬고 유민은 단번에 몰라서 보지 못한 것이 분명 더 슬픈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 유민에 따르면 공연이 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나의 모자람과 멍청함에 기인한 것이므로 탓할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 아프지만 맞는 말이다 …
국내에도 번역된 바 있는 < 리먼 트릴로지 > 의 스테파노 마시니가 < 맨해튼 프로젝트 > 라는 연극을 무려 체코에서 올린 적 있다 . 21 세기의 비극으로서의 자본주의를 무대화하는 것에 탁월한 작가다 . 공연은 체스키 부데요비체라는 체코 남보헤미아 지역의 극장에서였다 . 안타깝게도 공연 날짜가 모두 내가 여행으로 체코를 떠나 있는 때였다 . 스테파노 마시니가 공연을 올리던 체코를 뒤로하고 떠난 여행에서 나는 대신 매튜 웡의 특별전을 보았고 에스토니아 탈린 국립발레단의 <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 를 보았다 .
던컨 맥밀란의 < 몬스트럼 > 은 집에서 10 분 거리의 극장에서였는데도 예매를 미루다 매진이 돼 놓쳤다 .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공연을 보는 것에 너무 큰 피로를 느끼던 때라 예매를 망설인 탓이다 . ( 이 때에 유민은 내게 세상엔 미루거나 망설여선 안 되는 게 두 개가 있어 , 바로 예매와 입덕이야 ... 라고 말해주었다 .)
이곳에 머물면서 한국에서의 많은 기회들도 놓쳤고 나를 지나쳐선 안 됐다고 생각했던 여러 일들도 그저 나를 투과했다 . 지난 12 월 이후의 한국을 뒤로하고 왔다는 것도 그렇지 . 시차 때문에 탄핵 심판의 생중계를 보지 못한 채 잠들었을 때 , 거리에 나가던 친구들에게 시차가 끼어있는 응원과 부채감을 보낼 때 . 기어코 멀게만 느껴지던 재난들 .
대체로 무언가 늦거나 놓치는 나를 반복해 기다려주는 것은 영화 뿐이었다 . 열심히 본 것은 영화 뿐이다 . ( 이마저도 놓친 게 몇 있다 . 작년 한국에서 단 두 차례 상영해 매진으로 놓쳤던 앤드류 스캇의 < 바냐 > 실황 상영을 여기서도 놓쳤다 .) 게다가 한국과 달리 프라하 사람들은 아이맥스나 돌비 같은 특별관을 지척에 깔아두고 있으면서도 잘 보지는 않는지 그 좋은 상영관에서 나 혼자 영화를 보는 일이 잦았다 . 그렇게 < 썬더볼츠 > 를 세 번을 봤다 . 종류도 다양히 아이맥스 , 돌비 , 4D 를 각각 한 번씩 . < 썬더볼츠 > 를 보고 나의 첫사랑인 버키 반즈에게 제대로 다시 사고처럼 사랑에 빠졌고 그건 유민도 마찬가지라 , 유민의 집으로 그이의 군번줄도 제작해 보냈다 ...... 당연한 일이었다 . 마블 안 사랑했을 수 있나 ? 내 어릴적 꿈은 쉴드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 - 쉴드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등장하는 정보기관이다 ( 지금은 와해됐다 …)-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딱 맞추어 만난 공연도 있기야 있었다 . 스위스의 로잔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K 를 만난 뒤 , 프랑스의 남부로 넘어갈 계획으로 제네바에 호텔을 예약해둔 때였다 . 남프랑스 여행 뒤에는 포르투갈 여행을 이어야지 생각하며 포르투갈의 연출가 티아구 호드리게스의 근황을 찾았는데 , 그는 올해 프랑스 아비뇽 연극제의 총감독이라 그의 공연을 볼 기회는 없으리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 그러다 별 생각 없이 떠오른 거다 . 그나저나 아비뇽 ? 아비뇽 ... 아비뇽 하면 로메오 카스텔루치인데 ... 그 사람 요즘 뭐하지 ...
카스텔루치의 근황은 멀리 있지 않았다 . 제네바에 있었다 . 그는 정확히 내가 제네바에 머물기로 계획한 기간에 제네바 생피에르 대성당에서 < 스타바트 마테르 > 를 공연 중이었다 . 그간의 수많은 놓친 공연들을 싹 잊게 하는 도파민이 돌았다 . 정말 정확하게 제네바의 호텔을 예약해둔 사흘 내내 그의 공연이 있었다 ...
< 스타바트 마테르 > 에서 카스텔루치는 생피에르 대성당을 빌려 신과 종교 , 믿음이라는 것에 예술을 무기로 맞짱을 떴다 . 슬픔과 죽음을 무기로 신에게 질문했다 . 비범했고 아름다웠다 . 토르소를 끌어안고 울던 어린 아이들 , 비정하고 비참하게 흐르던 솔리스트들의 종교음악 , 악기를 무기처럼 군장으로 지고 객석을 돌아다니던 무장군인들의 군홧발소리 ......
이 공연처럼 이곳에서의 어떤 순간들은 분명 내가 용기를 내고 걸음을 옮기고 기꺼이 도착하기를 운명처럼 기다려줬다 . 반년간 머무른 이곳이 그간 내가 사랑했고 좋아했던 것들을 전부 내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곳이었음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 만나지 못했대도 , 존재조차 몰랐더라도 괜찮았다 . 모든 것을 충분히 사랑했다 .
이 시간을 모두 통과해 마친대도 아쉽지 않다 . 앞으로 겪어갈 날들도 나를 기다리듯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가늠할 수 있다 .
하여 프라하에서 꾸준히 배우고 익히고자 한 것은 역시
지나가는 것을 지나간 채로 두기
만나지 못하는 것은 그대로 두기
지나치고 스쳐가는 것에 의연해지기
놓치고 흩어지고 잊어버리더라도 슬퍼하지 않기
너무 서운해 말기
찰나처럼 나를 그냥 스쳐가는 것들 역시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음을 알기
이 정도일까 .
이건 도시를 사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 나를 지나치는 것들에 하염없이 외로워해서는 도시를 살아갈 수 없다 . 순간의 조우에 진심을 다하지 않으면 , 순식간에 흐릿해지고마는 것들에 미련을 쏟아서는 . 무엇도 영속하지 않는 곳에선 순간마다의 진심을 믿어야 한다 . 극장을 나설 때마다 선명했던 감각은 이것 뿐이다 . 이곳의 극장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 .
P.s. 미련 떨지 말자 ! 고 내리 적었으나 최근에는 카스텔루치의 베니스 연극제 공연 표를 못 구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지낸다 . 연극제에 맞춰 베니스를 가는데 그의 표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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